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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령 지산동 고분군 대가야 박물관 답사 준비

우주 푸른바다 그리고 고래 2020. 7. 10. 15:49

▣ 가야 연맹

★ 건국 신화 이야기

 알에서 태어난 수로왕

수로왕 신화가 기록된 가락국기는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쓴 ( )에 기록되어 있어요.

하늘이 열린 후, 이 땅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있지 않았고 임금과 신하의 호칭 또한 없었어요. 각 지역을 다스리는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9간만이 있었답니다. 어느 날 북쪽의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사람들이 그곳에 가보았대요. 그랬더니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답니다.

“하늘에서 이곳에 내려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명하셨다. 그래서 이곳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봉우리 위의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을 테다’ 라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면,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춤출 것이다.” 이 지시대로 사람들은 구지가를 부르면서 춤을 추었어요. 그러자 하늘에서 자줏빛 끈으로 묶은 금궤가 내려왔어요. 그것을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알이 6개 있었답니다.

사람들은 놀라고 기뻐하며 100번 절을 하고,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와 탑 위에 두었어요. 12일이 지나자 여섯 개의 알이 동자로 변했어요. 동자들은 10여 일이 지나 어른이 되어서 보름날에 왕으로 즉위를 했대요. 이들 중에 처음 알에서 깨어난 사람을 수로라고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나머지 다섯 사람 역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어요.

수로왕 신화는 고대 사회에서 김해지방을 중심으로 하나의 정치 집단이 만들어 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 있답니다.
김해 지역에는 그 당시 작은 단위의 권력 집단인 ( )촌이 있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 여섯 알은 북방에서 이주해 온 ( )을 가진 집단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요. 또한 알을 보고 사람들이 절을 하고, 기뻐했다는 것은 그들을 환영했다는 것을 의미한답니다.

구지봉 정상에는 바둑판식 고인돌이 있어요. 덮개돌에는 구지봉석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조선시대 명필 한석봉의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어요.

 

 대가야의 이진아시왕 신화

가야의 신화는 수로왕 신화만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대가야를 세운 이진 아시왕 신화가 있어요. 조선시대 중종 때 만들어진 <신중동국여지승람>이라는 책에 그 기록이 남아 있어요.

가야산의 산신인 여신 정견모주가 하늘의 신인 이비가지에 감응하여 두 아들을 낳았어요. 한 명은 대가야의왕 뇌질주일이고, 다른 한 명은 금관국왕 뇌질청예랍니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다른 이름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다른 이름이에요.

이 신화는 고령지방에서 전승되어 오던 것인데 이진아시왕과 금관국 수로왕이 서로 형제라고 되어 있어요.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로 밝혀진 것과 이 신화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가야의 중심이 김해의 금관가야에서 고령의 대가야로 옮겨간 이후의 사실을 이 신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은 수로왕과 달리 이주세력이 아니라 토착세력이 힘을 키워간 것이라고 해요.

 

 

▣ 가야 중심세력의 변화

가야는 ( )의 12국에서 발전하여 금관가야, 아라가야, 성산가야 등 6가야 연맹체 왕국으로 성장하였어요. 여러 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가야를 이끌던 연맹체의 대표 격 나라는 항상 같은 나라가 아니었어요.

★ 초기 가야의 중심지 -- ( )

가야의 소국 가운데 일찍이 두각 을 나타낸 나라는 김해에 자리 잡은 금관가야였어요. 금관가야 에서는 예부터 질 좋은 (   ) 많이 생산되고 ( ) 에 유리한 지역에 위치하여 주변 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성장하 였어요. 그 후 금관가야는 신라 를 돕기위해 출병한 고구려군의 침략을 받아 가야 연맹의 주도권 을 상실하게 되었어요.( 년)

✬✬ 여기서 잠깐 !!!

☞ 김해가 바다였다고???

지금의 김해는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어요. 그렇지만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김해는 해안가 였어요. 20세기에 들어 꾸준한 간척사업으로 인해 지금처럼 지형이 변하게 된 거랍니다.

 

--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에서김해를 찾으면, 남해와 가까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 후기 가야의 중심지 -- ( )

고구려의 침략으로 금관가야가 쇠약해지자, 5세기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금관가야를 대신하여 가야 연맹을 주도하기 시작했어요.

( )지역은 질 좋은 철이 풍부하게 생산되고, 농사짓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었어요. 이를 바탕으로 성장한 대가야는 가야 연맹의 새로운 중심 세력으로 떠오를 수 있었어요.

고령의 지산동 고분과 그 곳에서 나온 많은 유물은 대가야의 국력이 강성했음을 보여 주고 있어요.

대가야는 5세기 후반 삼국이 대립하는 틈을 타서 섬진강 하류 지역과 소백산맥 서쪽 지역까지 진출하였어요. 또 중국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으며, 고구려의 침략을 받은 신라를 도와주기도 하였답니다.

★ 대가야의 멸망

551년 백제와 신라는 힘을 합해 당시 고구려가 차지했던 한강 유역을 공격하여 빼앗았어요. 이 전투는 백제와 신라뿐 아니라 가야와 왜도 같이 참여했지요. 고구려에게 빼앗은 한강유역은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을, 신라는 상류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553년 신라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았어요. 신라의 배신에 백제는 가야와 왜군을 동원해 관산성에서 전투를 일으켰지만, 이 전투에서 성왕은 전사하고 백제 · 가야 · 왜의 연합군 역시 신라에게 패하게 되었어요. 비록 백제는 전쟁에서 패했지만 멸망에 이르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대가야는 이 전쟁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어요. 이후 신라는 가야의 소국들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가야의 멸망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어요.

9월에 가야가 배반하여 왕이 이사부를 시켜 이를 치게 하고 사다함으로 보좌역을 맡게 했다. 사다함이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달려 전단문으로 들어가 읜색의 깃발을 세우니 온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쩔 줄 몰랐다. 이사부다 군사를 인솔하고 닥치니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대가야는 신라 대군의 기습공격에 의해 562년 멸망하게 되었어요.

✬✬ 여기서 잠깐 !!! -- 퀴~~~즈

1. 다음 글을 읽고 빈칸을 채우세요.

금관가야는 (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바닷길을 이용해 중국과 ( )과 교역을 했습니다. 교역품 중에서 주요한 것은 ( )이었습니다.

( ) 침략으로 금관가야가 쇠약해지자 5세기에는 고령의 ( )가 금관가야를 대신하여 가야 연맹을 주도하기 시작했어요.

2. 다음 역사적 사실을 순서에 맞게 적어보세요.

가. 대가야의 멸망 나. 금관가야의 멸망 다. 관산성 전투

( ) ⟹ ( ) ⟹ ( )

3. 도전 O X 퀴즈 !!!

1) 가야가 세워질 당시 김해는 내륙지방에 위치해 있었어요. ( )

2) 금관가야의 수로왕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어요. ( )

3) 가야의 신화는 수로왕 신화만 존재한다. ( )

4) 금관가야는 관산성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 )

5) 가야는 철을 바탕으로 해서 많은 무역을 하였다. ( )

 

▣ 대가야의 무덤--지산동고분군

대가야의 지배층 고분군인 지산동 고분군은 고령읍의 서쪽 구릉에 위치하고 있어요. 구릉의 능선을 따라 조성된 이 고분군은 수십기의 대형 고분과 수백기의 중·소형분으로 구성되어 있어 가야 지역 최대의 규모랍니다.

 

★ 대가야 왕릉 전시관

지산리44호분은 주산 구릉의 맨 꼭대기에서 열 지 어 늘어선 5기의 대형분 중에서 남쪽으로 100m정 도 떨어진 경사면에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 어요.

1977년 발굴 조사된 이 고분은 지름 27m, 높이 6m의 규모로서, 안에는 3기의 대형 돌방과 이 돌방을 둘러싸듯이 배치되어 축조된 32기의 소형 순장돌덧널이 들어 있어요. 유물은 대부분이 도굴 되었지만 남은 것으로 금귀걸이, 금동그릇, 은장식 쇠창, 야광조개국자 등이 있어 원래는 아주 다양 하고 많은 껴묻거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어 요. 특히, 오키나와가 원산지인 야광조개국자는 대 가야의 원거리 교역 활동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예요. 고분의 입지, 규모와 구조, 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이 고분은 지금까지 발굴된 가야 고분 중 최고의 왕릉으로 보인답니다.

지산동 44호분은 모두 27명의 인골이 확인되었어요. 여러개의 각 방에 1~2명의 인골이 있었지요. 그 연령도 아주 다양하답니다. 위 그림은 부녀지간으로 보이는 순장자의 모습이에요.

✬✬ 여기서 잠깐 !!!

☞ 왜 순장을 했나요?

가야 시대 왕릉이나 귀족의 무덤을 발굴하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묻힌 것을 볼 수 있어요. 이것은 가야에 있던 ‘순장’이라는 풍습 때문이에요. ‘순장’이란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그들을 모시던 사람들을 함께 묻는 풍습을 말해요. 이 풍습은 신라에도 있었는데, 신라에서는 502년 지증왕 때 폐지했어요. 당시에는 죽어서도 이승의 삶이 연장된다고 보았기에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어요.

불교가 들어와서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산 사람을 죽여서 순장을 시키는 것보다는 살아서 일을 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면서 순장은 없어졌답니다.

★ 출토 유물로 보는 가야의 무사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여러 고분에서는 가야의 갑옷과 무기 등이 출토되었어요. 고대 사회는 전쟁이 일어나는 횟수가 많았지요. 그래서 신체를 효과적이며 안전하게 보호 할 수 있는 무기나 갑옷 등과 같은 군사용품의 개발은 당연한 일이었어요.

 

 

 

 

 대가야 사람들의 생활 --  대가야 박물관

 대가야 사람들의 집

대가야의 왕과 귀족들은 지금의 고령 읍내에 벽돌과 기와를 사용해 왕궁과 집을 짓고 살았지만, 일반인들은 원형이나 타원형 또는 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나무 기둥을 세워서 만든 움집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요. 집의 바닥에는 화덕자리가 한쪽에 치우쳐 있고, 불을 피웠을 때 나는 연기는 벽을 따라 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되요.

 대가야 토기

 

 

대가야 양식의 토기는 300 년대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대가야 의 힘이 강해지면서 그 사 용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 어요.

 대가야인의 금동관

지산동 32호분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되었어요. 신라지역의 화려한 금관과는 다르게 단순하고 투박해 보이면서도 우직한 느낌이 나지요. 그리고 지산동 30호분에서는 3~11세 정도의 어린아이의 뼈가 출토 되었는데 아마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왕자나 왕족으로 추정한답니다.

 대가야인의 대외교류

지산동 44호분에서 발견된 야광조개 국자는 왜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오한 유물이에요. 비록 여러 조각으로 파손 되어있지만, 원래는 대형 야광조개 껍질을 이용해 국자를 만든 것이에요. 이 야광조개는 일본 오키나와 근처 에서 나는 것으로 대가야에서 왜로 토기 · 금 동관 등의 물건이 건너갈 때 왜의 특산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 여기서 잠깐 !!! -- 퀴~~~즈

1. 다음 설명에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신하나 노비, 동물을 함께 묻는 것이예요.

-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더라도 지금의 생활을 그대로 누리라는 의미 에서 하게 되었어요.

- 부여에도 이 제도가 있었어요.

--- ( )

2. 다음 숫자을 더해 보세요.

- 가야가 생기기 전 임금과 신하의 호칭이 없고 ①□간만 있었어요.

- 수로왕 신화에는 하늘에서 ②□개의 황금알이 내려왔다고 해요.

- 가야금은 모두 ③□개의 줄로 이루어져 있어요.

--- ① + ② + ③ = ( )

3. 대가야의 지배층 고분으로 고령읍 서쪽 구릉에 위치하고 있지요. 가야지역 최대규모의 고분이지요. 이곳은 어디일까요?

--- ( )

4. 도전 O, X 퀴즈!!!

- 가야에서는 금관이 발견되지 않았다. ( )

- 가야인은 구슬을 사용해 많은 장신구를 만들었다. ( )

- 대가야는 순장을 하지 않았다. ( )

- 대가야는 해안가에 있었다. ( )

- 가야 사람들은 말에게도 갑옷을 입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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