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STM32Cube
- 태양광
- cad 명령어 정리
- UV접착제
- 고도센서
- STM32CubeIDE
- 드론고도
- 각도 계산법
- comand
- 탈 열쇠고리
- 5.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GPT를 MBR로
- Legacy BIOS
- 1부 돈은 빚이다
- USB 부팅드라이브
- MBR 을 GPT 로 바꾸기
- 2부 소비는 감정이다.
- 4. 세상의 바꾼 위대한 철학들
- MS5611
- Windows10 설치 USB 만들기
- 광전효과
- GY-63
- 수식
- 3부 금융 지능은 있는가?
- 고도제어
- 가야연맹
- 탈
- 태양전지
- 말투구
- TrueStudio
- Today
- Total
Space Whale
합천·고령 여행 합천 해인사 본문
▣ 지도로 찾아보는 합천, 고령
▣ 한 눈에 보는 고려 연표
▣ 고려-이민족과의 전쟁
★ 거란과의 전쟁
☞ 거란은 왜 고려를 침범 했나요?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요를 ‘짐승의 나라’라 부르면서 북진정책을 추진했어요. 그리고 중국의 송나라와는 화친 정책을 펴면서 사이좋게 지내면서 요나라에게는 적대적 이었죠. 송나라도 요를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친선을 도모하려 노력했습니다. 요는 이를 구실 삼아 침입하였지요. |
☞고려와 요 30년간의 대립과정
1차 전쟁 |
고려 (□□)↔ 요(소손녕) |
고려의 친송외교 |
서북국경 침입 서희의 담판으로 철수 |
□□□□ 얻음 |
2차 전쟁 |
고려 (□□)↔ 요(성종) |
강조의 변 |
개경함락 |
양규의 거란 격파 |
|
고려가 거란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지 않자 강조의 정변을 구실 삼아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습니다. 고려 강조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싸웠지만 크게 패하고 개경이 함락 당했습니다. 이때 강조는 요의 신하가 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고 장렬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한편 요의 성종은 장기전으로 보급로가 차단 될 것이 두려워 강화를 맺고 철군 하였습니다. 고려 장군 양규는 퇴각하는 요나라 군을 공격해 일곱 번 싸워 모두 대승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
3차 전쟁 |
고려 (□□□)↔ 요(소배압) |
강동6주 반환요구 |
강감찬의 □□□□ |
고려, 송나라, 거란 세력균형 |
|
소배압이 이끄는 요의 10만 대군이 세 번째로 침입 했을 때 강감찬은 홍화진 동쪽 골짜기에 기마병을 매복시켜 미리 준비해둔 쇠가죽을 밧줄로 꿰어 홍화진 동쪽의 대천을 막고 기다렸다가 요의 군사가 강을 건널 때 고려군은 강물을 터트려 적을 크게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쫓겨 가는 적을 귀주에서 다시 물 리쳐 큰 승리를 거두었지요. |
★ 여진과의 전쟁
☞ 여진 고려를 침입하다.
여진족은 일찍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섬기면서 말, 모피, 화살 등을 바쳤어요. 이에 고려는 식량 옷감 등을 주면서 회유 정책을 써서 안정을 유지 했지요, 그런데 여진족 내 강력한 세력이 등장하면서 만주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완예부가 여진족 전체를 통일하고자 하면서 고려와 무력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 했어요.
☞ 특공대 □□□ 을 조직한 □□
여진과의 첫 대결에서 보병만으로 힘든 싸움을 해야 했던 윤관은 여진의 기병에 맞설 군대를 조직 했는데 이것이 별무반 이예요. 윤관은 별무반을 맹훈련 시켜 특공부대원으로 만들었습니다.
별무반은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으로 나뉘었어요. 말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신기군에 말을 가지지 않은 20세 이상의 남자 중 과거 응시자가 아닌 사람은 모두 신보군에 편입 되었어요. 또한 승려들은 모두 항마군에 편입 되었지요. 별무반의 활약으로 고려는 마침내 여진 정벌에 성공 하였어요.
☞ 여진을 정벌하고 쌓은 성 -- □□□□
여진 정벌에 성공하고 동북지방을 점령한 윤관은 9성을 쌓았어요. 이것을 ‘동북9성’이라고 하죠.
하지만 수비의 어려움과 조공을 약속한 여진의 요구로 동북9성을 1년만에 반환합니다.
★ 몽골의 침입과 고려의 저항
☞몽고는 왜 고려를 침입했을까요?
고려는 강동성의 거란족을 몽골의 도움을 받아 공동 작전으로 몰아냈습니다. 이후 몽고는 고려를 복속국으로 취급하며 무리한 공물을 요구 하였고, 결국 두 나라는 불화가 싹트기 시작 했어요. 그러던 중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변에서 살해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어요. 몽골에서는 이를 빌미로 고려를 6~7 차례에 걸쳐 계속해서 침입했습니다.
☞ 세계의 지배자 몽골를 격파한 고려 민중의 힘
-----처인성 전투(제 2차 침입)
몽골군의 1차 침입 때 몽골을 막아내기 어렵다고 생각한 고려 광종은 화의를 추진하며 일단 몽골군을 철 수 시켰어요. 그 후 최우가 이끄는 무신 정권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몽골에 대항했습니다.
그러자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하면서 고려를 침략해 경상도까지 내려가 약탈을 일삼았어요. 그러나 고려는 항전을 계속 하였고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승려 김윤후의 지휘로 몽골에 대항하여 일전을 벌였어요.
김윤후가 활을 쏘아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함으로 전세는 고려군 쪽으로 기울었고 결국 몽골군은 서둘러 도망갔지요.
☞ □□□의 항쟁 (강화도 - 진도 - 제주도)
삼별초는 정부의 개경환도를 몽골에 대한 굴욕적인 항복이라고 생각하고 정부의 뜻과 상관없이 끝까지 대몽 항쟁을 하였습니다.
▣ 몽골의 침입과 팔만대장경
1231년 고려는 또다시 큰 전쟁을 겪게 되었어 요. 몽골군이 고려로 쳐 들어온 것이었어요. 칭기스칸이 세운 몽골은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러시아, 유럽까지 차지 한 역사상 유래 없는 세계 최대의 대제국이었어요. 몽골이 침입해오자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어요. 조정은 강화도로 가서 안전했지만 전국은 몽골군의 말발굽에 처참하게 짓밟혔어요.
몽고의 침입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고려는 부처님의 힘으로 이를 막고자 ‘팔만대장경’을 만들어요. 팔만대장경은 1237년부터 만들기 시작해 1251년에 완성이 되었어요.
▶ 대장경이란???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길이 전하기 위해 그 말씀을 야자나무 잎에 산스크리트어로 써서 남겼어요. 이것을 폐업경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 말씀을 모은 것을 ‘대장경’이라고 해요. ‘대장경’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 부처님이 정한 규칙인 율, 그 가르침과 규칙을 쉽게 풀이한 내용인 론이 담겨 있어요. 이것을 ‘삼장’ 이라고도 하지요. 대장경은 이 세 가지를 담은 광주리라는 뜻의 ‘트리피타가’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에요.
우리나라도 처음에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불경을 베껴서 사용했어요. 하지만 송나라 때 중국에서 대장경판을 만들어 사용하자 그 뒤 고려 때 처음 대장경을 만들게 되었답니다.
▶ 고려가 만든 대장경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기 위해 처음 대장경을 만들었어요. 바로 ‘초조대장경’이지요. 하지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자 다시 ‘고려대장경’을 만들게 되었어요.
✬✬ 여기서 잠깐 !!!
☞ 고려대장경? 팔만대장경?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은 고려 때 불경을 집대성한 것으로, 정식 명칭은 ‘고려대장경’이에요. 하지만 경판 수가 8만여 판(81,258)에 달해서 흔히들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리고 일반적으로 고대 인도에서는 많은 숫자를 표현할 때 8만5000 이라 하고, 인간의 번뇌가 많은 것을 8만4000 번뇌, 석가모니 부처님이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하여 부처가 되는 길을 대중에게 설법한 것을 8만4000 법문이라 한답니다. |
▶ 팔만대장경의 우수성
--- 불가사의라 불리는 방대함과 완벽함
고려대장경은 여러 나라 대장경 중 세계 최대 규모이고, 내용도 우수하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런지 함께 알아보아요.
첫째, 고려대장경은 내용이 아주 방대해요.
초조대장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북송과 거란의 대장경까지 부처님의 말씀을 모두 모아 실었거든요.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전 세계 대 장경 가운데 내용이 가장 방대하지요.
둘째. 내용이 매우 정확해요.
다른 대장경과 비교 검토해서 틀린 내용을 확인하고 바로잡아 <교 종별록>이라는 기록을 남겼어요. 그래서 고려대장경은 여러 대장경 의 기준이 되었고, 오늘날 다른 나라의 학자들도 대장경의 원본으 로 삼고 있어요.
셋째, 경판을 만든 기술이 아주 빼어나요.
훌륭한 가공 기술로 보관성을 높였고, 빼어난 글씨체로 판각(나무조각에 그림이나 글씨를 새 기는 것) 해서 과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우수 하지요. 마치 숙달된 한 사람이 모든 경판을 새긴 것처럼 판각수준이 일정하고 아름다워 조선시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는 그 글씨를 보 고 “이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마치 신선이 내려와서 쓴 것 같다.”고 감탄했어요. 또한 오 자나 탈자가 거의 없으며 근대에 만들어진 것 처럼 상태도 아주 양호한 편이에요. 그래서 세계는 팔만대장경을 두 고 “목판 인쇄술의 극치다”, “세계의 불가사의다”라는 찬사를 아끼 지 않고 있답니다.
그리고 760년이 지난 지금도 인쇄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죠??
이렇게 빼어난 조건을 두루 갖춘 ‘고려대장경’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어요.
▣팔만대장경 보존의 비밀 -- 장경판전
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 을 보관하고 있는 보관 하고 있는 건물로 만들 어진 지 760년이 지났 어요. 팔만대장경이 아 무리 훌륭한 문화재라도 제대로 보존되지 않았다 면 지금에 와서 그 가치 를 제대로 평가받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하지 만 고려 사람들이 치밀한 계산을 하고 건물을 지은 덕분에 팔만대장경은 오랜 세월을 무사히 지냈어요.
▶ 장경판전의 위치와 구조에 숨은 비밀들...
첫째, 장경판전은 바람이 잘 통하는 경사지에 서남향을 바라보게 지었어 요. 서남향건물은 햇빛이 들어오는 시간이 길고 건물 앞으로 그림 자가 지지 않아요. 원래 장경판전 뒷산에서는 습한 바람이 불어오 지만 하루 종일 비치는 햇빛이 습기를 날려준답니다.
둘째, 장경판전 지붕은 진흙으로 구운 기와를 올려요. 진흙으로 구운 기 와는 열전도율이 낮아 온도변화가 적어요. 그래서 건물 안의 온도 를 일정한 유지하기에 알맞아요.
셋째, 장경판전은 앞, 뒤, 위, 아래로 서로 다른 크기의 살창을 가지고 있어요.
이렇게 창의 크기를 다르게 하면 공기가 들어와서 곧바로 나가지 않고 안에서 돌 게 되요. 이렇게 해서 판가 구석구석에 공기를 순환시켜준답니다. 바로 이 점이 나무로 된 경판이 오래도록 썩지 않은 비결이에요.
넷째, 판가(경판을 꽂아두는 책꽂이)에 바람이 잘 통하도록 만들었어요.
일반책꽂이는 책을 꽂는 앞면만 뚫려 있지만 판가는 앞, 뒤, 옆, 아래 모두 뚫려 있어요. 이렇게 사면이 뚫린 판가는 공기가 사방으 로 통하기 때문에 경판에 습기 찰 염려가 없어요.
그리고 각 경판마다 경판보다 두께가 두꺼운 마구리를 끼워 놓았기 때문에 경판 사이가 벌어지게 되고 이 틈으로도 공기가 통하게 된답니다.
▶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이 겪은 위기의 순간들...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은 그동안 여러 차례 손실될 위기에 처했었어요. 언제 어떤 위험이 있었는지 알아봅시다.
✐ 조선 왕조 실록에 따르면 일본사신이 올 때마다 대장경을 달라고 해서 인쇄해 주었지만, 나중에는 경판을 달라고 사신이 와서 단식까지 하며 졸랐지만 주지 않았어요.
✐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고려대장경을 약탈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이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들과 승병들이 해인사를 지켜냈답니다.
✐ 한국전쟁 때 북한군을 소탕하기 위해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에 김영환 대령이 해인사 주변만 폭격해서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은 무사할 수 있었답니다.
✐ 이 외에도 해인사에는 1695년 부터 1871년까지 총 7차례의 화재가 있었어요. 하지만 다행이 장경판전에 불이 옮겨간 적은 없었어요.
▣ 해인사 이야기
가야산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때 지은 절이에요.
왕비의 병을 낫게 해 준 순응과 이정스님이 수행하던 작은 암자자리에 애장왕이 감사의 마음으로 절을 짓게 했어요.
해인사에는 대각국사 의천과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 등 큰 스님들이 많이 나왔어요. 또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 고려의 백운거사 이규보, 조선의 추사 김정희 등이 해인사와 주변 절에서 자신의 글과 글씨를 갈고 닦았지요.
✬✬ 여기서 잠깐 !!!
☞ 삼보사찰이 뭐에요 ??? -- 통도사, 송광사. 해인사 -- 삼보사찰이란 세 가지 보물을 가지고 있는 사찰이란 뜻이에요. ✐ 불보사찰 -- 통도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어요. ✐ 승보사찰 -- 송광사 --고려시대에만 16명의 국사를 키워냈어요. ✐ 법보사찰 -- 해인사 --부처님의 말씀, 대장경을 봉안하고 있어요. |
▣ 고대사회 발달의 원동력 -- 철!!
한반도에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년 경부터였어요.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들어왔지요. 이후 기원전 200년이 되면서 철기는 빠른 속도로 한반도에 퍼졌어요.
★ 고대사회, 철로 만들어갑니다.
철기제품들은 청동보다 단단하기 때문에 일상생활 도구인 농기구와 무기로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어요. 철의 유용성을 잘 알게 된 사람들은 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정복전쟁을 하게 된답니다.
전쟁을 통해 철제 무기를 얻은 사람들은 계속되는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그 결과 주요 세력 집단이 되었어요. 고대 사회에서 철을 가지고 철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어요.
★ 풍부한 철과 제철기술을 가진 --- 가야
경상남도에는 철이 나는 곳이 17군데나 된다고 해요 이 중 13곳이 김해와 고령 등의 장소랍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합천 야로현이라는 곳에서 매해 철 9,500근을 세금으로 바쳤다고 해요.
김해 부근 은 철의 매장량이 풍부하기도 했지만, 철을 가공하는 기술도 뛰어났어요.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덩이쇠랍니다.
덩이쇠는 철제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 되는 중간 단계의 제품이에요. 이 덩 이쇠는 3세기 후반에서 6세기까지 부 산과 김해지방의 대형 고분에서 발견 되었어요. 녹여서 사용하는 것 이외에 도 화폐처럼 사용되어 지배층의 껴묻 거리로도 사용되었답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Total lunar eclipse red moon 22/11/08 (0) | 2022.11.10 |
---|---|
고령 지산동 고분군 대가야 박물관 답사 준비 (0) | 2020.07.10 |
역사 조선의 건국 창덕궁 종묘 (0) | 2020.06.11 |
역사 고창 고인돌 유적 (0) | 2020.06.04 |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 (0) | 2020.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