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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건국 창덕궁 종묘 본문
고려 말에서 조선의 건국까지
★ □□□□, 원나라의 비호아래 활개를 치다...
고려후기 대표적인 지배세력은 바로 권문세족이었어요.
이들은 원나라 간섭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친원세력의 대표주자로 활동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백성들의 땅을 빼앗아 거대한 농장을 경영했답니다. 이런 권문세족들이 백성들을 통치하는 주된 생각은 바로 불교였어요. 초기 불교의 순수함과는 다르게 고려 말기의 불교는 귀족과 결탁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으고, 승려들 역시 타락하여 그 처음의 마음을 잃고 말았지요.
★ □□□, 개혁정책을 펼치다.
★ 유교를 바탕으로 성장한 □□□□□...
고려 말기에 등장하여 체재개혁을 주도한 이들이 있었어요. 바로 신진사대부에요.
이들은 귀족출신보다는 하급 관리나 지방 향리 계층으로 백성을 핍박하는 불교를 반대했어요. 그 대신 공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성리학을 생각의 중심으로 삼았지요.
★ □□□□□□ 의 등장...
고려 말 원나라와 대치하던 홍건적은 고려를 자주 침략했고, 왜구들은 해안지방을 중심으로 계속 백성들을 괴롭혔어요. 부패한 고려의 권문세족들은 이 침략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지요. 함경도 출신이었던 이성계는 홍건적과 왜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워 자연스럽게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등장한 신흥무인 세력들이 개혁을 주장하는 신진사대부와 자연스럽게 결합하게 됩니다.
★ 신진사대부의 분열... □□□, □□□
신진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온건파와 급진파로 세력이 나뉘어졌어요.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는 고려내의 개혁을 원했고,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파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를 원했지요. 결국 신진사대부의 급진파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무인세력이 결합하여 온건파를 누르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게 된답니다.
★ 위화도 회군은 단행한 □□□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원나라를 몰아내고 새 주인이 되었어요. 명나라는 조선이 원나라와 손을 잡고 자기 나라를 위협 할까봐 고려를 좋게 보지 않았죠. 그러더니 옛날 공민왕이 자주 정책을 펴서 원나라에게서 찾은 <쌍성총관부>가 있는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렸어요. <철령위>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자기네가 직접 다스리겠다고 하면서 말이죠.
이에 고려 왕실과 최영은은 명나라와의 전쟁을 각오하고, 이성계에게 요동 정벌을 명령했어요.
하지만 이성계의 생각은 달랐어요. 명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이 고려에 이득이 없다고 여겼어요. 이성계는 4대 불가론을 앞세워 명나라와 전쟁을 피하려 했지만 우왕과 최영의 요동 정벌의 명령만 반복했어요.
결국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였지만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개경으로 되돌렸어요. 그리고는 곧바로 정권을 잡고는 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다음 왕으로 세우고, 그리고 최영도 유배를 보냈어요.
☞ 요동정벌 4대 불가론
고려말 조선의 건국 과정
✬✬✬ 여기서 잠깐 !!! ✬✬✬
☞ 이방원 VS 정몽주시조 대결
유교를 근본으로 한 조선의건국
★ 조선의 건국
위화도에서 돌아온 이성계는 1392년 개성의 수창궁에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에게 왕위를 이어받는 형식으로 고려를 넘겨받았어요.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한동안은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하다가 ‘고조선’의 역사를 계승하고 민족의 주체성을 찾는 의미에서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어요.
조선을 다스리는 세 가지 원칙
★ 한양으로의 천도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흉흉해진 민심의 쇄신을 위해 새 도읍지를 찾기 시작했어요.
★ 한양 속 유교
정도전은 유교의 정신을 담아 경복궁, 종묘, 사직단 등의 위치와 이름을 정하는 등, 한양을 설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세계 문화유산 창덕궁
★ 세계문화 유산이 된 창덕궁
어느 나라든 궁궐은 왕조의 권의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질서 정연 하고 웅장하게 짓는 경우가 많아요. 중국의 궁궐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도 유교 예법에 따라 일직선상에 질서 정연하고 웅장하게 배치되어 있지요. 그에 반해 창덕궁은 주어진 환경에 맞게 지어져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답니다. 창덕궁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을 이용한 공간배치입니다. 창덕궁은 궁궐을 구성하는 건물과 정원은 물론 돌과 나무 한 그루까지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이러한 이유와 5대 궁궐 중 건물의 보존 정도가 가장 좋은 점을 인정받아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어요.
★ 불행한 역사 속에서 탄생한 창덕궁
1392년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어요. 그러면서 나라를 대표하는 궁궐로 경복궁을 지었지요.
하지만 후계자 문제로 이성계의 5번째 아들 이방원등은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은 방원은 형 방과를 2대왕 정종으로 임금 자리에 앉혔어요. 왕위에 오른 정종은 다음해에 수도를 옛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으로 옮겼어요. 살육의 현장인 한양이 싫었기 때문이지요. 왕위에 욕심이 없었던 정종은 즉위한지 2년 만에 동생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어요. 이방원은 3대 태종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태종은 아버지가 수도로 삶았던 한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요. 그러나 형제의 난이 일어났던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께름칙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경복궁 동쪽에 궁궐을 세우게 하고 그렇게 지어진 것이 창덕궁입니다.
★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진 태종 이방원
창덕궁 돌아보기
★ 창덕궁의 정문 □□□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궁궐의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정문이에요.
태종 때에 처음 지어진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고 지금 남아 있는 돈화문은 광해군 때에 다시 지었어요.
돈화문의 정면은 다른 궁궐의 정문들이 대게 3칸인데 비해 5칸으로 되어 있어요. 황제국만이 5칸의 정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 조선의 궁궐은 3칸으로 해야 했지요. 조선을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조선 임금님의 마음이 엿보이는 문입니다.
★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
다른 궁궐들은 정문에서 직선거리에 금천교가 있지만 창덕궁은 흘러내리는 산자락에 맞춰 자연스럽게 건물의 위치를 잡았기 때문에 꺽인 자리에 금천교가 있어요. 이곳의 금천교는 태종이 처음 궁궐을 지을 때 만들어진 것으로 궁궐의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 된 다리랍니다.
★ 궁궐 안의 관청 □□□□
창덕궁 출입문인 돈화문에서 인정전으로 들어오다 보면 금천교 북쪽으로 관청 지역을 볼 수 있어요. 조선 시 대에 관청은 궁궐 밖에 있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왕의 일과 밀접한 관 련을 가진 곳은 궁궐 안에 있었답니 다. 와의 비서기구인 승정원, 왕족의 의료를 담당했던 약방(내의원)을 비롯하여 왕의 칙령과 문서, 경서, 사적을 관리했던 옥당(홍문관), 오늘날 국립 도서관에 해당하는 규장각 등은 궁궐 안에 있었습니다.
★ 나라의 큰 행사가 열렸던 ---□□□
이곳은 궁궐의 중심 건물로 정전이라고 하기도 해요. 인정전에서는 많은 업무가 이루어 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의식이나 왕의 즉위식 등 공식적인 행사가 치러졌습니다.
☞ 그럼 인정전에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볼까요?
★ 청기와가 얹어진 - 선정전
왕은 집무실인 선정전을 출퇴근 하며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고 결정 했지요. 왕의 편전은 보통 정전의 뒤쪽에 있는데 창덕궁의 편전인 선정전은 정전 옆쪽에 있어요.
여기서도 자연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건물을 지으려한 조상들의 지혜와 철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선정전은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전각이에요. 유교 국가인 조선은 궁궐을 검소하게 짓고 사치하지 않는 것을 왕의 덕목으로 여겨 일반 기와보다 몇 배나 비싼 청기와는 아무 건물에나 올리지 않았어요. 선정전을 청기와로 올린 것은 그 만큼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지요.
★ 서양진 식으로 꾸며진 임금님의 침전 - 희정당
희정당은 본래 왕의 침전 이었어요.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때 불타 없어졌다가 인조 때 다시 세워졌지요. 이곳에 있던 희정당은 본래 아담한 건물 이었어요. 그러나 순조 때에 창덕궁에 큰 불로 희정당이 타 버리자 일본 사람들이 경복궁에 있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 그 재료로 희정당을 다시 세웠어요, 겉모습은 조선식이지만 건물 안은 서양식으로 꾸며진 현재의 희정당이 만들어 졌답니다. 이때부터 이곳이 왕의 침전대신 집무실인 편전으로 쓰이게 되었지요.
희정당 내부
희정당은 양탄자와 유리 창문, 서양식 의자 등 조선 말기에 들어온 서양 문물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 왕비의 침전 대조전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침실이자 왕자와공주의 탄생지였고, 어린 왕자와 공주를 교육시키던 곳이기도 해요. 매우 중요한 장소였지요. ‘크게 만든다’는 뜻의 대조전이란 이름은 국가의 기틀을 이어가는 세자를 큰 그릇으로 만들어야 백성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합니다. 대조전에는 처음에는 왕비가 머물다가 훗날 왕과 왕비가 이곳에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왕은 왼쪽 방을 왕비는 오른쪽 방을 사용했어요. 부부라면 당연히 같은 방을 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조선의 왕과 왕비는 잠자는 곳이 달랐답니다.
종묘란 어떤 곳일까???
★ 조선의 뿌리인 종묘
유교에서는 사람은 영혼인 혼과 몸인 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봐요. 그리고 사람이 죽게 되면 혼과 백이 나뉘어져 영혼인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몸인 백은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시신은 땅에 묻어 묘를 만들고, 영혼은 사당을 만들어 모셨어요.
사당에는 죽은 사람의 혼령이 의지할 수 있는 신주를 모셨어요.
▶“종묘사직이 위태롭습니다.”
텔레비전 사극에서 이런 대사를 들은 적이 있나요?
종묘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에요. 사직이란 임금이 정기적으로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랍니다. 종묘는 조선의 왕실을 상징하고, 사직은 나라의 근본을 즉, 나라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이 되었답니다.
이 때문에 종묘와 사직은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선왕조가 가장 먼저 지어야 할 건물이었지요.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단이 세워졌답니다.
☞ 나라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던 곳 -- 사직단
사직의 ‘사’는 토지의 신을, ‘직’은 곡식의 신을 의미해요.
사직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먼 옛날 제천의식에서부터 발전한 것이에요. 사직단은 나라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신성한 제사의식이 치러지던 곳이었어요.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사직단의 건물들이 철거되고 사직공원으로 만들어져 본래의 위엄을 잃고 훼손되고 말았어요.
★ 종묘의 역사
종묘는 경복궁보다 먼저 1395년에 완성되었어요. 처음 지어진 종묘는 정전7칸, 공신당 5칸이었어요.
그런데 세종 때 정종이 돌아가시자 정종의 신주를 모실 방이 없었어요. 5개의 방에는 이성계의 4대조 할아버지와 태조 이성계가 모셔져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세종은 정전 이외에 별도로 조상의 신주를 모실 수 있는 영녕전을 지어 태조의 4대조를 따로 모셨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셔야 할 왕들은 계속 늘어갔어요. 그래서 종묘는 명종 때 4칸이 더 늘어 11칸이 되었어요.
종묘로 들어가는 길
★ 임금님도 말에서 내려요
▶ 말에서 내리시오 -- 하마비
하마비는 태종 때인 1413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지금의 하마비는 현종 때인 1663년에 세운 것이에요. 하마비에는 ‘지차개소인원하마비’라고 새겨져 있어요.
여기에서부터는 신분이 높고, 낮음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에요. 종묘는 모든 사람이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야 할 만큼 신성하고 경건한 곳이라는 뜻이에요.
★ 종묘로 들어가는 문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이에요. 외삼문이라고도 불리지요. 외대문은 궁궐의 정문처럼 크고 웅장하지 않아요. 단청도 붉은색과 푸른색 두 가지만 사용하여 화려하지도 않지요. 종묘는 왕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이었기 때문에 화려함 보다는 경건함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에요.
외대문에는 붉은 화살 모양의 나무가 세워져 있어요. 이것을 ‘홍살’이라고 하는데, 경건한 곳이므로 경의를 표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외대문에는 3칸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문은 혼령이 드나드는 문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양옆으로 난 문을 이용해요.
★ 울퉁불퉁 세 개의 길
외대문을 들어서면 거칠고 넓적한 돌들이 깔린 길이 나와요. 이 길은 가운데가 높고 양옆은 낮게 만들어져 있어요. 이렇게 3개로 나누어진 길을 ‘삼도’ 라고 한답니다.
이 삼도의 높은 길은 영혼이 다니는 신도이고, 오른쪽 길은 왕이 다니던 어도, 왼쪽 길은 세자가 다니던 세자도예요. 종묘의 주인공은 임금이 아니라 죽은 왕들과 왕비들이기 때문에 혼령이 다니는 길이 가운데 높게 나 있는 것이에요. 가운데 있는 신도는 왕도 함부로 밟을 수 없었지만, 제사에 쓰이는 향이나 예물을 들고 가는 재관들은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었어요.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
★ 종묘를 바라보는 곳 -- 망묘루
망묘루는 임금이 종묘에 도착하면 잠시 머물던 곳이에요. 망묘루는 ‘앞선 왕들과 종묘를 생각한다.’는 의미를 가진 건물이에요. 망묘루는 종묘 안의 다른 건물과 다른 점이 있어요. 바로 지붕이에요. 종묘의 다른 건물의 지붕 모양은 단순한 맞배지붕으로 만들어져 있어요. 종묘는 죽은 영혼들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장식을 최소화해서 경건한 느낌을 들게 하기 위해서에요. 그런데 망묘루의 지붕은 종묘에서 유일하게 화려한 팔작지붕이에요 왜 그럴까요?
종묘의 핵심 - 정전, 영녕전
★ 정전
종묘 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 은 정전이에요. 국보 제 227호로 지정되어 있어요. 정전은 신주를 모신 신실 19칸 그 좌우의 익일각 2칸, 익실 끝에 동월랑과 서월랑 각 5칸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돌아가신 분에게는 서쪽을 높은 위치로 보는 서상제도에 따라 서쪽의 첫 번째 칸에 태조의 신주를 모시고 차례대로 태종, 세종을 모셔 맨 마지막에는 순종의 신주가 모셔져 있어요. 조선시대에는 음력 1월, 4월, 7월, 10월과 12월에 제를 드렸는데 지금은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종묘대제를 지내요.
★ 영녕전
세종 때에 정종임금이 돌아가시자 정전 신실이 모자라 중국 송나라에서 별묘를 마련한 기록을 보고 만들었어요. 가운데 4칸에는 목조, 익조, 도조, 환조를 모시고 서쪽부터 정전에서 옮겨오신 왕들을 순서대로 모셨어요. 조선시대에는 봄과 가을에 제사를 드렸는데 지금은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정전 제사를 지내기 전에 먼저 영녕전 제사를 드려요.
★ 공신당과 칠사당
공신당에는 임금이 정치를 할 때 공로가 큰 신하들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이에요. 정전에 계신 왕들의 공신들만 83위가 공신당에 있어요. 공신당에 있는 공신 중에는 황희,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송시열등 훌륭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어요. 정전에 같이 모셔지기에 이들을 배향공신이라고 하며 배향공신은 왕이 돌아가신 후 선발되어 종묘대제 때 같이 제사를 지냈어요.
칠사당에는 일반 백성들의 신앙의 대상이었던 7신의 신위판이 모셔져 있어요. 인간의 운명, 문의 출입, 음식의 일, 거주하는 곳, 성문의 출입, 죽음과 형벌, 도로의 왕래 등을 관장하는 신들의 위판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면서 나라와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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