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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부 성균관 (서울대 규장각) 본문
★ 우리나라의 시대별 교육기관
한양에 수준 높은 유학 교육 성균관이 설치 되었으며, 그 후 한양에서는 4부 학당, 지방에서는 각 고을에 설치된 향교에 입학하여 유각을 공부 했습니다.
조선 시대 교육의 목적은 유교적 소양을 기르고 관리를 양성하는 데 있었습니다.
천민이 아니면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양반 자제들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양반 자제들은 어려서 서당에 입학하여 문자를 익히고 초보적인 유학 지식을 쌓았습니다.
최고의 국립대학교 -- 성균관
성균관은 조선시대 인재 양 성을 위하여 서울에 설치한 국립대학격의 유학교육기관 이자 나라의 큰 의례를 치 루는 장소였기도 합니다.
태학 · 반궁 · 현관 · 근궁 · 수선지지라고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학부의 명칭 으로 ‘성균’이라는 말이 처 음 사용되었던 것은 고려 때에요. ‘성균’ 은 음악의 조율을 맞춘다는 말로서 어그러짐을 바로 잡고 과불급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에요.
★ 여러 번 이름을 바꾼 성균관
우리나라 최고학부의 명칭으로 ‘성균’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 되었던 것은 1298년(충렬왕 24)에 국학(국자감을 개칭한 것)을 성균감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된다.그 뒤 1308년에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성균감을 성균관이라 개칭하였지요. 1356년(공민왕 5)에는 배원정책에 따른 관제의 복구로 다시 국자감으로 환원되었습니다.
공민왕은 개혁을 추진하면서 이전의 국학인 성균관을 다시 세우고, 개혁을 이루어 나갈 신진 사대부들은 이곳에서 성리학을 익혀 개혁에 적용시키려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색, 정도전, 정몽주, 이성계 등이 모두 이곳 성균관 출신의 신진 사대부이다. 공민왕은 종래까지 성균관에 유교학부와 함께 설치되어온 율학 · 서학 · 산학 등의 기술학부를 완전히 분리시켜 따로 교육시키게 함으로써, 성균관은 명실공이 유학교육만을 전담하는 최고학부가 되었다.고려시대 때의 위치는 개성에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한양 천도에 따라 한양의 숭교방으로 옮겨졌다가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 여기서 잠깐 !!!
☞ 유교와 유학 ?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학문을 유학이라고 하고 이것을 종교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유교라고 함. 공자는 기원전 55년 중국에서 태어난 학자인데 인과 예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여기서 인(仁)이란 사람을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예(禮)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예의를 말해요. 공자는 인과 예를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아 , 가정과 정치에서도 인과 예를 실천하라고 했어요. 유교의 중요한 도덕으로는 부모에 효도, 임금에 대한 충성, 사람과 사람사이의 믿음 등이 있어요. |
★ 배움의 장소에서 존경심을 표하라 - 하마비
대소관리과차자개하마
- 대소관리 로서 이곳을 지나가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려라.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말을 타고 이곳 을 지나가는 사람은 말에서 내려야 한 다는 비문이 적혀있어요
조선시대 궐문, 문묘, 종묘 앞에 세워 놓은 석비에요
태종13년(1413년)에 처음으로 예조의 건의하여 왕의 허가를 받아 나무로 만든 표목을 세운 것이 계기가 되었어요.
★ 서로서로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래 - 탕평비
영조18년 (1742년) 3월 26일 왕 세자가 성균관에 입교한 즈음에 영조의 어명으로 성균관 만수교 위에 세워진 비석 탕평이란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 무편 왕도평평에서 온 것으로 공 정한 정치를 해야 통치자의 입지 가 평탄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당시 조선은 소론과 노론 등 붕당 정치의 원래 의미를 잃고 그 폐해가 심각한 상황이었어요. 이에 영조는 장차 국가를 이끌어갈 성균관 유생들에게 정치의 올바른 길을 알려주려는 뜻에서 친필을 내리어 탕평비를 세웠어요.
탕평비에는 ‘두루 친하되 편당을 가르지 않는 것이 군사의 마음이요. 편당만 짓고 남과 두루 친하지 않은 것은 소인배의 사사로운 마음이다.’라고 쓰여 있어요.
☞ 영조의 탕평책 학문과 정치적인 이념을 같이한 사람들이 모인 붕당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지만 서로 감시하며 성장하는 긍정적인 면이 많았어요.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다른 붕당을 인정하지 않고 비판을 받아들이지도 않으려고 했어요.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하는 공존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적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영조는 갈수록 심해지는 당쟁을 없애기 위해 골고루 당파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인재를 뽑았는데 그것이 바로 탕평책이에요. |
★ 중국과 한국의 성리학 대가들, 그의 제자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어요. --- 대성전
대성전 안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의 제자 신위와 중국 성리학의 대가의 신위 그리고 퇴계와 한국의 대표 성리학자의 신위 등39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어요. 지금도 이 분들께는 일 년에 크게 두 번(2월과 8월) ‘석전제’라고 제사를 드리고 있어요.
이 제사는 ‘문묘제례’라고도 하는데 공자님이 문(文)을 이룬 분이라 해서 문성왕이 불리기 때문에 그 제사를 문묘제례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조선조 때 아주 중요한 제사였기 때문에 임금이 직접 와서 제를 올렸습니다.
☞임금이 직접 제사를 지내는 제사 ◈ 종묘제례 -----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 ◈ 사직제례 -----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 ◈ 문묘제례 -----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 |
✬✬ 여기서 잠깐 !!! ---미션 1 찾아보자.
올곧고 변하지 않는 군자의 상징 -- ( ) 통( ) ,불통( )
☞ 알아보자 -- 조선시대 대표적인 생활규범 삼강 오륜
조선시대 사회질서를 생활규범을 통해서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삼강 - 유교 도덕의 기본 | 오륜 - 유교의 다섯가지 실천 덕목 |
◈부위자강: 아들은 아버지를 섬겨야 한다. ◈군위신강: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해야 한다. ◈부위부강: 아내는 남편을 섬 겨야 한다. |
◈부자유친: 아버지와 자시에는 친함 이 있어야 한다. ◈군신유의: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 ◈부부유별: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장유유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붕우유신: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
★ 학문을 위한 공간 -----명륜당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수행하 던 강학 장소로서 유교 경전 을 중심으로 선비정신과 인 격을 연마하고, 국가 발전을 위한 지도자의 덕목들을 익 히는 장소로 사용되었어요.
당시에는 매일 새벽에 북이 울리면 학생들은 명륜당 아 래에 늘어서서 한번 읍 한 뒤 당에 올라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강학하였어요. 또 이곳은 유생들의 시독과 소과 , 대과를 행하는 과거장으로도 활용 되었어요.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 내용 가장 기본적인 것은 사서와 오경. (주자학 외에 이단서는 철저히 배격) - 사서 : 대학, 논어, 맹자, 중용 - 오경 :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 기타 : 근사록, 성리대전, 통감, 좌전, 송원절요, 경국대전, 동국정운이 있었는데 과거시험에 따라 과목이 변경되기도 하였으며, 글 짓는 방법과 필법도 익힘 |
✬✬ 여기서 잠깐 !!! ---미션 2 찾아보자.
유생들이 공부하며 생활했던 기숙사 -- ( ) 통( ) 불통( )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학 생들은 유생이라고 불렀 어요. 누구나 성균관 유 생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입학자격은
정규학생인 상재생의 경 우 초시인 생원, 진사시 에 합격한 생원 진사들이에요. 그러나 생진사들로 자리가 다 차지 않으면 사학생 즉 하재생으로 정원을 충당했어요. 그들 사이의 규율이 엄격했어요.
▶▶ 성균관 유생들의 엄격한 규율
1. 시험을 보아 그 성적은 연말에 종합하여 식년시에 참작한다.
2. 도교, 불교 등 관련 책을 읽는 자는 벌한다.
3. 조정을 비방하는 자, 스승을 모독하는 자, 권세에 아부하는 자는 벌함
4. 오륜을 범하는 자, 절개를 굽히는 자, 교만한 자, 스스로 자랑하는 자, 사치한 자,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민 얼굴빛으로 남의 환심을 사려 는 자는 재에서 쫓아낸다.
5. 시험 점수는 대통, 통, 약통, 조통, 불통으로 나누어 조통 이하는 벌함
6. 매월 8, 23일은 정기 휴일로 세탁을 하거나 부모를 찾아뵙는 여가를 준다.
7. 해마다 품행이 단정하고 시무에 밝은 인생 1~2명을 천거하여 사용한다.
★ 관리가 되는 길 ----- 조선시대의 과거제
과거에는 문과, 무과 , 잡과가 있었어요.
문관을 뽑는 문과는 예비 시험인 ‘소과’와 본 시험인 ‘대과’로 나뉘어요.
소과는 다시 생원과와 진사과로 나뉘어요. 소과 합격자는 흰 종이에 쓴 합격 증서인 백패를 받아요. 성균관에 입학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고 대과를 볼 자격이 생지지요.
대과는 초시, 복시, 전시 등 세 차례 시험을 거쳐 모두 33인을 가렸어요. 그 가운데 세 번째 시험인 전시는 합격자 33명의 순위를 정하는 시험으로 국왕 앞에서 치렀어요. 국왕과 과거급제자 사이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어 국왕의 은혜를 잊지 않고 충성을 다짐하는 자리였지요.
이렇게 복잡한 절차와 단계를 통과한 문과 합격자은 홍패라는 붉은 종이로 만든 합격증을 받아요. 주로 양반들이 응시했어요.
과거 시험 중 문과가 가장 중시되었으며 무관을 뽑는 무과는 병조에서 주관 하는데 상민들도 응시 할 수 있었어요.
무과는 초시, 복시, 전시 3단계를 거쳐 28명을 뽑았어요. 역과, 율과, 의과, 음양과가 있는 잡과는 예조와 해당 관청에서 주관했으며 기술관을 뽑는 시험이어서 주로 중인들이 응시하였어요.
3년에 한 번씩 치르는 정기시험인 식년시와 임시시험인 별시가 있었어요.
▶▶ 무엇에 쓰는 돌일까요???
성균관 유생들의 시험은 한 달에 30회 이상이다 보니 수험생들의 스트레스가 대단했어요.
유생들은 말 그대로 밥 먹고 공부만 했던 거지요. 기숙사 앞에 있는 이 돌은 유생이 시험을 잘못 보았을 때 스스로 이 돌 위에 올라가 자신의 종아리를 쳤다고 합니다. 스스로가 자신을 자신의 공부를 되돌아보는 거지요. 그럼 여러분의 지금 어떤가요?
✬✬ 여기서 잠깐 !!! ---미션 3 찾아보자.
성균관 유생들의 식당 --- ( ) 통( ) 불통( )
동재, 서재로 나누어 기숙하면서 공부하 던 유생들은 아침, 저녁식사 때마다 식 당에 비치된 도기에 서명하게 되어있었 어요. 이것은 원점을 계산하는 근거가 되는 것으로서 아 침, 저녁 두 번 식당 에 들어가면 원점 1점을 얻게 되지요.
이 원점은 오늘날의 출석 점수와 같은 것으로서 300점을 받은 사람만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어요.
✬✬ 여기서 잠깐 !!! ---미션 4 찾아보자.
우리 나라 대학 도서관의 효시 -- ( ) 통( ) 불통( )
성종 때 한명회의 건의로 건립되었으며 성종은 수 만권의 책을 하사하였어요.
두 번의 화재를 겪기도 했지요. 서적으로는 여러 가지 역사서와 성리학 중심의 유가 서적이 많았고 불교. 도가와 기타 잡류의 도서와 기술 서적은 소장하지 않았어요.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효시로서 조선시대 말기까지 유일한 대학도서관으로서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지요.
★ 문과 무를 겸비한 선비가 되어라 -육일각
글공부 외에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 기예 즉 음악, 말타기, 예법, 산술(수학), 서예, 활쏘기에도 잘해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특히 궁도는 신체 연마에 좋은 효과가 있었다고 해요.
이 곳 육일각은 그 목적을 위하여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장소에요.
✬✬ 여기서 잠깐 !!! ---미션 5 찾아보자. 통( ) 불통( )
✬✬ 여기서 잠깐 !!! ---퀴 즈
( ) 부터 우리나라에는 ( )를 가르치는 학교가 있었어요.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국립 학교인 ( ) 을 세웠어요. ( )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이라고 할 수 있지요. 통일신라 때는 당나라에 세워진 ( )을 본 떠 만든 ( )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웠어요. 또 대조영이 세운 발해에도 ( )이라는 국립 교육 기관이 있었고 ( )에서도 귀족들의 아들들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치기도 하였지요. 고려는 수도인 개경에 ( )이라는 국립대학을 세웠고 고려 말 공민왕 때 ( )에서 이름을 바꾸어 ( ) 이라고 하였다. ( )은 유교를 가르치는 최고의 국립대학으로서 조선시대까지 그 명맥을 이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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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O. X 퀴즈
- 성균관의 학교장인 대사성을 지냈고, 대성전문묘에 배향되어 있는 조 선의 성리학자는 율곡 이이 선생이다. ( )
- 고구려시대 최초의 국립대학은 태학이다. ( )
- 유학을 가르치고,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추모하는 문묘가 있는 조선 시대 최고의 국립대학은 성균관이다. ( )
- 문묘의 정전으로 공자의 위패를 모셔놓은 건물은 명륜당이다. ( )
- 대성전에서 매월 음력초하루,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대규모의 제 례를 거행하는데 이 의식을 무엇이라 하나 종묘 제례라 한다. ( )
-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수행하던 강학장소로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선비 정신과 지도자의 덕목을 익히는 장소는 명륜당 이다.( )
- 명륜당 동서로 있는 건물로 유생들이 공부하며 생활하던 기숙사인동재, 서재이며 서재에는 소과에 붙은 생원과 진사 들이 생활했다.( )
- 경전을 비롯한 많은 책을 보관하던 도서관으로 우리나라 대학도서관의 시초라 할 수 있는 곳은 존경각이다.( )
- 오늘날의 초등학교에 해당하고, 동짓날 입학하는 곳은 서당이다.( )
- 오늘날의 국립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곳으로 국가가 유교이념을 지방 까지 보급하기 위해 고을마다 설치한 지방의 학 교는 서원이다.( )
조선의 보물창고 -- 규장각
100년 전, 500년 전, 1000년 전 우리 동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개울도 있고, 마을도 있겠죠?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동네 길을 걸었을까?
아무리 눈을 감고 상상을 해봐도 잘 되지 않죠?
그런데 조선시대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곳이 있어요. 바로 조선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규장각이에요. 규장각은 조선시대를 알 수 있는 보물창고예요.
★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마라!
정조가 규장각 관리들 에게 한 말이에요. 정 조는 왕이 된 뒤 창덕 궁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답고 한적한 곳에 2층 건물을 지었어요. 왼쪽 2층 건물이 규 장각이에요.
1층에는 역대 왕들이 직접 지은 글이나 왕 이 쓴 글이나 왕이 쓴 글씨들을 보관했어요.
2층은 학자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곳이었어요. 규장각 왼쪽에 있는 건물은 서향각이라고 하는데 종이로 만든 책들이 망가지지 않게 햇볕이나 바람에 말리는 일을 하던 곳이에요. 연못 옆의 정자, 부용정 오른쪽에는 과거 시험을 치르던 영화당이 있어요.
✬✬ 여기서 잠깐 !!!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마라, 일할 때는 공적인 일이 아니면 청으로 내려가지 마라, 규장각에서 공부하는 학자가 아니면 아무리 높은 관리라 하더라도 규장각에 올라갈 수 없다. 일할 때는 관을 쓰고 의자에 앉아라.” --- 규장각에서 공부하는 관리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적어놓은 거예요. 규장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는 정조의 마음을 엿볼 수 있지요. |
★ 정조는 왜 규장각을 만들었을까?
정조가 왕위에 오를 때 사도세자의 아들, 다시 말해 ‘죄인의 아들’이라고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었어요.
정조는 왕이 힘을 다져야만 나라가 안정될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장용영’이라는 왕을 지키는 부대도 만들고 규장각을 지어서 인재들을 불러 모았답니다.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만들어 나랏일을 한 것처럼 정조는 규장각을 만들어 학문을 바탕으로 살기 좋은 조선을 만들고 싶어 했어요.
정조는 왕위에 있는 24년 동안 규장각 학자들과 함께 151종류, 3960권의 책을 펴냈답니다.
★ 지금 규장각은 어디에 있을까?
규장각은 정조가 죽은 뒤 다시 예전처럼 자료를 보관하는 일 정도만 하게 되었어요. 조선 후기 고종이 규장각을 되살리려고 했지만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
일본은 아예 규장각을 없애고, 규장각에 있던 책들을 경성국제대학으로 옮겼어요.
1945년, 일본이 물러가자 경성국제대학이 서울대학교로 바뀌면서 규장각 책들도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옮겼어요.
그 후 1992년에 따로 건물을 지어 규장각의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답니다.
왕이 쓴 글씨와 기록화
★ 누가 쓴 글씨일까요?
왕이 손수 쓴 글씨를 어필이라고 해요. 글씨는 쓴 사람의 정신을 담는다고 해요. 왼쪽의 글씨는 누가 쓴 글씨일까요?
펄펄 힘이 나는 것 같지요?
선조가 그린 난초 그림이에요. 선조는 그림도 잘 그리고 글씨도 아주 잘 썼 다고해요.
▶ 왕후가 쓴 한글 편지
인목왕후가 쓴 한글편지에요. 인목왕후는 선조의 두 번째 부인이에요. 1603년 11 월 19일에 쓴 편지인데 가까운 사람 가 운데 아픈 사람이 있었나 봐요. 아픈 게 좀 나았는지 걱정하는 내용이랍니다.
조선의 공식글자는 한자이지만 왕실의 여 성이나 양반집 여성들은 한글을 많이 사 용했어요. 이 한글편지는 그때 한글이 어 땠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에요.
★ 임금들의 뜨끈한 목욕탕
조선시대 임금들이 즐겨 찾던
온양행궁이에요. 임금님이 나들이 하거나 다른 일로 궁궐 밖 행차를 할 때 머무는 곳을 행궁이라고 해요. 온양행궁에는 온천이 있어 조선 시대 왕들은 온양행궁을 자주 찾았답니다.
가운데 큰 건물에 온천이라고 쓰여 있어요. 바로 왕들이 목욕하던 곳이에요.
<온궁사실>이라는 책에는 온천 건물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나와요. 또 사도세자가 목욕 할 때 쓰던 물건들이 나오는데 오동나무 바가지, 큰 함지박, 조그만 물바가지, 놋대야 같은 목욕용품부터 수건을 몇 장 썼는지까지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답니다.
★ 실제 얼굴과 똑같이 그려라!
조선시대 초상화를 보면 왕뿐만 아니라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 승려, 사대부라 고 하는 양반들, 부부 모습까지 다양해 요. 초상화를 가리키는 말도 다양한데 왕을 그린 초상화를 어진 또는 어용이 라고 해요. 그 밖에는 화상, 영정, 진 상, 진영이라고 해요. 이 이름들을 보면 ‘참 진(眞)’자가 들어간 게 많아요. 왜 그럴까요? 거짓 없는 그대로를 그리는 게 초상화라고 생각해서 그랬을 거에요.
옛날 사람들은 겉모습만 있는 그대로 그린 게 아니라 그 사람만의 특징이나 성격을 정확하게 알고 그리려고 했어요.
★ 조선시대에도 청계천이 있었어요?
청계천은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하천이에요
산들이 사방에서 서울을 둘러싸고 있고 그 한가운데에 청계천이 흐르고 있어요.
한양을 둘러싼 산은 도시를 지켜 주는 천연 요새이기도 하지만 비가 많아 오면 도시 한가운데로 물이 모여 홍수가 날 위험이 있어요. 그래서 태종 때 처음 청계천을 뚫었답니다.
조선 후기 영조 때엔 한양으로 이사 오는 사람들이 청계천에 모여 살았는데 그 사람들이 버린 오물로 청계천이 더러워졌어요.
게다가 땔감을 얻기 위해 가까이 있는 산에서 나무를 마구 베어서 쓰니 산들은 벌거숭이가 되어 비만 오면 흙이 쓸려와 청계천에 싸이게 되었어요.
청계천 바닥은 점점 높아져 홍수 위험이 더 커지게 되자 영조는 청계천 공사를 하게 했던 거에요.
★ 나라의 잔치에 초대 합니다!
▶ 왕세자와 함께하는 잔치
<서연관사연도> ‘서연’은 왕세자와 왕세자를 가르치는 관리들이 함께 책을 읽고 공부하는 자리를 말해요. ‘사연’은 임금이 베푸는 잔치랍니다. 중종은 인종을 세자로 삼은 지 16년이 된 것을 축하하며 왕세자의 스승과 왕세자와 가까이 있는 관리들을 초대해 경복궁에서 잔치를 베풀었어요. 이 그림은 그때 잔칫날의 모습을 그린거에요.
▶ 왕세자의 입학식
효명세자의 성균관 입학식을 그린 그림이에요. 왕세자의 입학식은 성 균관을 방문하여 공자를 모신 대성 전을 참배하고, 명륜당에서 성균관 박사에게 제자로서의 예를 행하고 가르침을 받는 의식이었어요. 그러나 왕세자가 입학식을 하고 계속 성균관에 다니는 것은 아니었어요. 입학식은 한 차례의 행사로 끝났지만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하는 의식을 통해 스승에 대한 예를 표하고 학문을 굳건히 해 성군이 될 것을 다짐하는 의미가 있는 행사였답니다.
** 왕실 기록의 꽃 -- 의궤 **
의궤는 ‘왕실의 모범이 되는 책’이라는 뜻이에요. 왕실에서 치르는 여러 가지 일들을 기록해 놓은 책이에요. 의궤를 만들 때는 왕이 보는 어람용과 일반적인 분상용을 따로 만들어요. 왕이 보는 책은 종이도 좋은 것을 쓰고 표지도 비단으로 감싸고 장식도 달아요. 의궤에는 그립뿐만 아니라 왕실 행사가 어땠는지 자세하게 기록한 글도 있어요. 왕이 행사 기간 동안 내린 명령서, 일을 맡은 관리들이 주고받은 공문서, 행사에 동원된 사람들의 수와 물품, 돈 쓴 내역, 행사 때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상, 일한 사람들의 이름들까지 모두 적혀 있어요. 이런 상세한 기록을 보면 조선시대 왕실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 있답니다. 의궤는 조선 초부터 나라에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만들었어요.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모두 160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에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대부분 불에 타 없어져 버렸거든요. 왕실행사 모습을 그림과 글로 꼼꼼하게 기록한 의궤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조선에만 있는 특별한 전통이에요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인정 받았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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